포르투갈 혁명

This is the Korean translation of the article The Portuguese Revolution by Alan Woods (June, 1974)

June, 1974(1974년 6월)

출처 : http://www.marxist.com/History/portugal1974.html

옮긴이 : 이덕하(2002-10-23)


포 르투갈 노동자들의 운동은 전세계 노동 민중(working people, 근로 인민이라고도 번역함)을 고무(inspiration, 영감)해 왔다. 파시즘 국가의 50년간의 잔인한 억압이 있은 후에 포르투갈 노동자들은 사회를 바꾸려는 불굴의 의지를 드러냈다.

4월 25일의 쿠데타는 상층부에서의 재배치에 불과했지만 사회의 엄청난 압력을 반영했다.

13년간의 유혈낭자한 식민지 전쟁에 기인한 자원과 인력의 엄청난 손실은 이미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나라였던 포르투갈을 경제 붕괴 직전에 빠뜨렸다.

인 구 900만명의(Greater London보다 약간 많다) 작은 나라에서 예산의 40%가 군비로 쓰인다. 공식 통계는 인구의 40%가 문맹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250만 포르투갈인들이 가난과 4년간의 아프리카 전쟁을 위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떠나야 했다. 군비에 대한 치솟는 지출은 현재 25-3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의 소용돌이에 뒤틀림을 더했다.

이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위기는 지배 계급 대열에 분열을 불러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혁명은 상층부에서 시작된다! 포르투갈 교회내에서의 불화는 스페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과정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포르투갈 자본주의의 좀 더 선견지명이 있는 대표자들은 이전 방식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불만은 전체 사회로 퍼져서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민감한 부분-군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13 년 후 아프리카에서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모잠비크에서 포르투갈 군대는 Frelimo에 몰리고 있었다. 기니 비사우(Guinea-Bissau, 옛 Portuguesse Guinea)의 많은 지역은 벌써 포르투갈로부터, 많은 나라가 승인한 임시혁명정부로 넘어갔다. 55,000명 이상의 포르투갈 부대가 앙골라에서 포로가 되었다(pinned down).

포르투갈 정규군의 싸우고자 하는 의지는 점점 약화되었다. 탈영이 확산되었다. 젊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모국을 떠나 자신의 이해관계(interest)가 걸려 있지도 않은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에서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 프리카에 있던 그들은 점점 수풀에 들어가는 모험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불만의 정서는 사병에 가까운 하급장교와 하사관에게로 확산되었다. 마지막으로 군대의 최상위 계급(ranks)에도 왜곡된 반향을 일으켰는데 Spinola의 책 포르투갈과 그 미래Portugal and the Future란 책이 그것이다.

아프리카로부터의 포르투갈의 철수를 주장한 걸로 널리 알려진 이 책 때문에 Spinola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명성을 쌓았는데 특히 그가 이 책 때문에 Caetano에게 해임되었을 때 그랬다.

사실 Spinola가 주장한 것은 “ 기 니, 모잠비크, 앙골라 등의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포르투갈 연방 내의 자치 정부(self-determination with a federation linked to Portugal)로 수립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자는 것이다.” 이 해격책은-Caetano 자신이 이전에 제시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두가지를 전제한다 : 첫째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의 독립을 “준비”시킬 권리가 있다(즉 그들이“준비”되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실권을 쥐고 있겠다)는 것이고 둘째 아프리카인들이 포르투갈 연방에 들어오고 싶어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땅에 포르투갈 병사가 한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연방”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거짓이고 속임수에 불과하다.

“공산” 당 언론(press)이 Spinola에 부여한 평판은 진실에 대한 치욕적인 희화화이다. 어떤 사람은 샛별Morning Star을 읽으면서 Spinola가 혁명적 민주주의자의 딱맞는 모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별[the Star, Morning Star지를 비꼬는 말인듯]은 4월 27일자 1면에 기니에 있는 Spinola와 그의 부대 사진을 싣고 다음과 같은 논평을 달았다 :

“그 는 기니에 머무는 동안 내내 그들의 통제하에 있는[!] 부족 족장들과 기니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군대 자체내에서 개인적 인기를 위해 굉장한 운동(spectacular campaign)을 벌이면 보인 처신이 눈에 띄었다. 군 내에서 그가 얻은 명성은 병사의 편이라는 것이었다(His reputation among the military was that of a soldiers' man).”

은 Spinola가“기니에 머문” 이유, 즉 기니 해방투사들을 절멸시키는 전쟁에서 포르투갈 군의 사령관(Commander in Chief)으로서 그가 거기에 머물렀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니비사우의 임시정부의 대변인은 Spinola를 “웃음과 피의 인간”이라고 묘사한다. 그 은 한번도 Spinola가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Franco)의 편에서 싸웠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평생 지배 계급과 파시즘의 대의에 봉사했다.

난데없이 그는 샛별의 도움으로 “민중 민주주의(people's democracy)”의 전사가 되었다!

그 쿠데타는 소위 “군대 운동(Armed Forces Movement)”의 젊은 장교들에 의해 일어났다. Financial Times 회상하듯이 :

“접근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증거에 의하면 Spinola 장군은 4월 25일 혁명을 계획하는데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Spinola와 그의 도당은 그 운동의 선두에 서서 그 운동의 폭발이 안전한 한계내에 머무르도록 하려 했다. 이것은 Marcello Caetano 자신이 …

“반란군에 둘러싸인 중심 도시의 Carno 병영의 작은 화장실에 앉아 Spinola가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나라의 지도권을 넘겨받으라고 빌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반란군 본부에서 온 특사가 Spinola의 조촐한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와 동시에 일어났다. … 그는 그 특사에게 대통령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Financial Times, 1974년 6월 5일)

그러면서 그들은 풋내기 마술사처럼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힘들을 풀어놓았다.

junta의 지도자들은 “나라의 해방과 빼앗겼던 포르투갈 민중의 시민적 자유의 복권에 대한 강령을 완수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그들은 그들이 약속한 자유선거와 제헌의회를 만드는 “이행기”에 군부의 통치(military rule)를 지지할 것과 “평온함”을 호소했다.

그 러나 Caetano을 전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곧 대중은 거리로 나왔다. 라디오를 통한 어떤 경고도 [사람들의] 홍수를 막을 수 없었다. 성난 군중은 사복경찰과 밀조자를 거리에서 쫓았다. 몇몇은 군대가 개입해 그들을 체포하기-다른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전에 살해되었다. 이렇게 “비밀 경찰의 일소”가 노동자들 자신들의 행동에 의해 지체없이 실행되었다.

junta는 더 나아가 정치수들을 석방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장군들을 그렇게 하도록 밀어붙인 것은 대중행동이었다 : “junta는 유죄판결을 받거나, 재판을 앞두거나, 형사범으로 고소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정치수를 석방할 것이며 Caxias의 죄수들은 그들의 분류에 대한 공식 결정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샛별, 1974년 4월 27일)

5000명의 군중은 악명 높은 Caxias 교도소를 둘러싸고 모든 죄수의 석방을 요구해서 체제가 그것을 고려하게 만들었다.

junta 의 허락이나 충고 없이도 노동자들은 파업할 권리를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법률가들의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시위의 권리를 실행에 옮겼다 : 당당한 500,000명의 시위대가 노동절(May Day)에 리스본(Lisbon) 거리를 행진했다. 신문사의 직원들은 그들 스스로 파시스트 편집자들을 숙청했으며 많은 경우에 신문의 경영 자체를 인수했다.

공 공 노동자들(public employees)은 자발적으로 집회를 가지고 파시스트인 각 부서의 장을 제거했다. 혁명적 정서는 군대의 사병 사이에 들불처럼 번져갔다. 병사들은 반란의 상징인 붉은 카네이션을 소총의 총신에 꽂고 행진을 했다.

해 군들(sailers)은 노동절에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배너를 들고 노동자들과 함께 시위를 했다. junta에게 가장 불길한 일 중 하나는 Republica란 저널에 기니에 주둔중인 육군, 해군, 공군 병사들이 서명한 즉각적인 평화를 요구하는 편지가 실렸다는 것이다.

Spinola와 그의 도당은 포르투갈 노동자들의 운동을 공포와 경악을 느끼며 지켜보았다. 이런 규모의 운동에 직면하여 군사적으로 운동에 보복하여 권력을 재탈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군대 자체가 여러 조각으로 분열될 것이었다.

용감한 “민주주의자”는 용기있는 자는 신중해야 한다(discretion was the better part of valour)고 판단했다. 자본가와 지주들의 대표들은 이 폭풍에 고개를 숙이고 타협적인 해결책을 찾기로 결정했다 &endash; 당분간은.

보 나빠르뜨주의자 Spinola는 대중에 대한 통제와 제한의 유일한 희망은 노동 계급 조직들의 지도자들의 지지에 의존한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했다. 이 전략에서 핵심역할을 공산당(CP)와 사회당(Socialist Party)의 지도자들이 맡을 것이다.

하루밤 사이에, 민주주의의 도래와 함께, 공산당과 사회당은 급속히 성장했다. 사회당 지도자(Socialist leader) Soares와 공산당 지도자 Cunhal이 도착하자 대중적인 시위가 그들을 맞아 주었다. 둘 모두는 “민주주의자” Spinola에게 그들의 희망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 지도자들은, 칠레나 스페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장군들과의 연합을 다른 누구보다도 요란스럽게 주장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 공산당(PCP)의 초기의 공식 성명은 다음과 같았다 :

“노동 계급의 통일된 행동이 필요한 시점에 민주주의적인 세력(forces)과 청년들이 어느때보다 더 필요한데, 민중의 세력(people's forces)과 민주주의적인 기질이 있는 군(democratically-minded military) 사이에 강한 동맹이 필요하다”

공 산당 지도자들이 junta에게 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싶다는 명백한 암시를 Spinola는 놓치지 않았다. 우익 법률회사 이사(right-wing lawyer and company director)인 Da Palma Carlos가 포르투갈의 수상을 하고 그 아래에 “사회주의” 외무장관, “공산주의” 노동부 장관(당연하게도) 그리고 공산당 지도자 Cunhal(무임소 장관without portfolio)가 참여했다.

포르투갈의 상황과 비슷한 역사적 예가 없진 않았다. 어떠한 위대한 혁명도 처음 단계는 1917년 러시아의“2월 혁명”에 대응한다.

짜 르가 전복되면서 민중 대중이, 가장 후진적이고 정치적으로 무지한 농민 계층을 포함하여, 청지적 삶의 무대로 떠오르면서 민주주의 강령으로 모든 사회계급이 통일된다는 환상이 만들어졌다. 대중들은 해방감과 당장 승리했다는 느낌 속에서 임시정부에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자들과 손을 잡은 멘셰비키들과 사회혁명당원들(SRs)의 미사여구에 쉽게 속아넘어갔다.

당시 상황에서 레닌이, 외국인 스위스에 있었음에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와 포르투갈의 “레닌주의자들”의 반응을 비교하는 것이 교훈적일 것이다. 그가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볼셰비키들에게 맨 처음 보낸 전보는 다음과 같았다 :

“우리의 전술 : 새 정부에 어떤 믿음도 지원도 주지 말 것 : 케렌스키Kerensky[임시정부의 '자유주의적' 지도자 - AW]가 특별히 의심스럽다.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시키는 것이 유일한 보증이다 : 페트로그라드 시의회(City Council)의 즉각적인 선거 : 어떤 다른 당과도 화해하지 말 것.” (레닌, 전집 23권 292쪽)

포르투갈에서 소위 공산당은 줄곧 “자유주의적” 자 본주의 정당들과의 바로 그런 연합을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2월 이후의 경과에서 볼 수 있듯이, 레닌이 설명한 대로, 노동자 계급을 조직하고 무장시키며 그들을 Spinola-Kerensky 유형의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만이 노동자들의 성과물을 방어할 수 있고 노동자 권력으로의 전진이 가능해진다.

오늘날 포르투갈에서 노동자 계급은 전진을 위한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손으로 파시즘을 패배시켰다고 느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그들 자신의 권력을 이해하는 과정에 있다.

노동자들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들 중 어느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민주주의” 의 도래는 그들을 두드러지게 했을 뿐이다. 유럽에서 가장 낮은 노동자들의 임금은 끊임없이 인플레이션에 침식당하고 있다. 가난한 농민들은 여전히 그들의 자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1년의 반은 자신의 농장을 떠나 다른 곳에 이주해야만 한다. 포르투갈의 젊은 꽃들은 4년간의 억압적인 식민지 전쟁을 위해 여전히 군대에 징집되고 있다.

노 동자 계급에게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숭배되는 성스러운 소가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만약 민주주의가 삶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인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쓸모가 없다. 포르투갈 민중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은행가와 지주와 자본가들의, 그들의 성향이 파시즘적이든 “민주주의적”이든, 계급적 이해관계와 양립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자본가 계급이 어떤 정치적 형태(“민주주의” 또는 파시즘)를 취하는가는 개인적인 변덕이 아니라 그들이 노동자 계급에게 도전을 받는다고 느끼느냐 아니냐에 의해 결정된다.

본능적으로 포르투갈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 계급적 이해를 촉진하기 위해 민주적 권리를 이용했다. “파업의 권리” 가 만약 실행될 수 없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노동자들은 민주주의를 법률가의 상투적 어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해한다. 제빵 노동자, 조선소 노동자, 우체부, 버스와 전차 운전수들과 심지어 톨게이트 요금원들도 그들의 참을 수 없는 생활 표준에 대항해 파업을 했다.

이 모든 것에 샛별은 어떤 할 말이 있을까? 이 파업들은 단순히 “일요일(5월 26일)에 있었던 난폭한 초좌익(ultra-left) 시위, 이 시위대는 최루가스와 기마 돌격(mounted charges)로 흩어졌다, 를 따라 일어났다.” (1974년 5월 29일)

최루가스와 기마 돌격! 오래 전에 있던것과 너무나 비슷하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은, 그들은 수치스럽고도 파렴치하게도 대중파업을 “난폭한 초좌익” 시위와 연결시킨다, 논점을 회피한다. 언제부터 노동자 대중이 “난폭한 초좌익” 때문에 파업을 벌였나? 이것은 노동자들의 신문이 아니라 사장들의 선정적인 신문의 언어이다. 그 어디에도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가 무엇이었는지에(기본 월급 £ 110)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왜 그 은 이상하게도 침묵하는가? 왜냐하면 공산당이 참여했던 자본주의적 임시정부가, 정부가 제공한 비참한 최저 임금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답인 파업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Financial Times지는(1974년 5월 29일자) 명백한 만족을 보이며 junta의 경제 정책이 “기업계에 의해 광범위하게 환영받았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비참하게 적은 수입으로 살아야 하는 노동자들은 동의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endash;의 이해관계에서초자도(even in the interests of &endash; democracy)”.

파업 노동자들은 매스미디어(“언론의 자유”)에 의해 끊임없는 비방을 당해야 했다. Galvao de Melo 장군(“민주주의적” 장군!)은 TV에서 이렇게 말했다 : “많은 일들이 우리를 실망시켰으며 그런 감정과 위엄속에서 이루어진 이 부당대우의 배은망덕함이 우리를 거의 아연실색하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노동자들이 실제로 파업의 권리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 그런 배은 망덕은 어떤 “민주적 장군”도 아연실색하게 할 것이다.

러시아의 멘셰비키들은 그들이 한창일 때 레닌과 트로츠키를 반동의 “어두운 힘”과 한통속인 독일 첩자라고 비난했다. 같은 류의 오랜 노랫말이 최근에 포르투갈 “멘셰비키”에 의해 반복되고 있다.

CDE-포르투갈의 “민주주의자들”의 조직-은 “초좌익[?]이 반동의 동맹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샛별, 1974년 5월 29일) 반동의 위험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누구로부터? 다음날 그 은 다음과 같이 썼다 : “오늘 Spinola 대통령이, military junta의 우두머리인, 필요하다면 폭력에는 힘으로 맞서는 것에 망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현 상황의 위험이 나타났다.”

이리하여 그 자신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샛별은 Spinola의 참된 본성을, 자본의 이해관계를 가차없이 대변하는, 드러내었다.

Spinola 의 겉으로는 있어 보이는 힘은 지배계급이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으며 반면 아직 노동 계급이 권력을 획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그 결과 생긴 진공상태에서 Spinola는 포르투갈의 보나빠르뜨로서 두 계급의 대립 속에서 어부리지 격으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자유를 약속한다; 그리고 자본가에게는-좀 더 진실된 것인데- 모든 “자유의 남용”이 분쇄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겉 으로는 힘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Spinola의 기반은 허약하다. 그것은 계급의 역관계의 불안정한 평형상태에 의존한다. 노동자 대중 조직들의 결정적인 밀어붙힘 한번이면 Spinola의 보나빠르뜨주의적 체제는 세계를 뒤흔들 노동자 권력 체제에 자리를 내 줄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들 자신의 지도부에 의해 억제된 상태이다.

핵 심적 문제는 여전히 아프리카에서의 전쟁에 놓여 있다.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전쟁에 지쳐있다. 하지만 전쟁은 질질 끌며 계속되고 있다. 기니비사우와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모잠비크에서의 포르투갈 군은 증강되었다. 식민지들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Almeida Santos 장관은 최근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 “포르투갈 군의 의도는 휴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모잠비크에서 Frelimo 게릴라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 들은 상황이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있고 의심의 여지없이 철수를 강요당하겠지만 장군들은 여전히 아프리카에 포르투갈의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다는 희망에 매달리고 있다. 그들이 완전히 소진한 기니비사우를 마지못해 포기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하지만 석유와 광물이 풍부한 앙골라는 작년 £ 104,000,000의 무역 잉여(trading srplus)가 있었다(이 대부분은 모잠비크와 기니에서의 전쟁자금으로 흩러들어갔다). Spinola의 전술은 “자치self-determination”를 가장하여 기만과 술책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게릴라들은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앙골라 민중 해방 운동(Angolan People's Liberation Movement)의 지도자인 Agostingho Neto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 “우리는 앙골라의 행정, 군, 경찰을 통제하는 포르투갈에 의해 조직되는 국민투표를 거부한다.”

Spinola 정부에 참여한 공산당 대표는 수치스럽게도 그들의 기본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의무를 회피했다 : 아프리카에서의 모든 포르투갈 부대의 즉각적이고 조건없는 철수를 요구하는 것. 공산당 지도자 Cunhal(무임소 장관)은 junta의 식민지 전챙을 가리는 “좌익적” 무화과 나뭇잎 역할을 한다.

“ 우 리는 해결책-자치[Spinola식의 자치-AW]를 바탕으로 한 식민지 전쟁의 정치적 해결책-에 다가가고 있다. 식민지 전쟁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광범위한 정부 안에서, 비록 가끔 다른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공통점들이 있다. 군사적 해결책은 없으며 정치적 해결책만 있을 뿐이다... 현시기 본질적인 점은 협상을 해서 해결책을 위한 공통적 기반을 찾는 것이다.” (샛별, 1974년 5월 50일)

이 런 비겁한 회피와 왜곡은 포르투갈 공산당 지도자들이 포르투갈 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투쟁하는 대중들을 대변해 달라는 모든 요구를 져버렸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다. 그들은 억압당하는 사람들과의 단결 대신에 억압하는 사람들과의 단결을 선택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을 격화시키려는 junta의 어떤 시도도 군대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분열시킬 것이다.

주 로 징집된 군대(mainly conscript army)는 평화주의에 감염되어 있고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무기임이 입증될 것이다. 미국 자본가들은 마침내 그들의 군대가 불만에 차 있고 싸우길 원하질 않자 베트남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만 약 포르투갈 자본가들이 완고하다는 것이 드러날 경우 아프리카에서 같은 과정이 신속하게 전개될 것이다. 그들이 이전의 식민지들에서의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기까지는 아마 몇 달 정도 밖에 안 걸릴 것이다. Soares가 협상에 광적으로 매달린다는 사실이 벌써 이것의 징후를 보여준다!

아프리카 게릴라에게 공산당 지도자들은 ... Spinola와의 협상을 제공한다. 생존 임금(living wage, 생활 임금)을 위해 싸우는 포르투갈 노동자에게 공산당 지도자들은 “평온, 신중, 단결”을 요구한다. (샛별, 1974년 5월 21일)

노동자들의 투쟁은 “반동적 세력에게(reactionary forces)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초좌익”으로 신비스럽게 규정된다. (샛별에서 Cunhal을 인용함, 1974년 5월 21일)

공산당이 “초좌익”에게 부여한 과장된 중요성이 우스꽝스러울지라도 그들이 미칠 수 있는 폐해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 르크스주의자들은 공산당과 사회당을 따르는 대중을 자신의 강령으로 획득하기 위해 참을성있게 투쟁하는 전망을 가질 것이다. 분파주의자들은 운동의 방향을 잃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쓸데없는 행위(futile gesture)와 설익은 모험은 반동 세력에게 행동을 취할 기회를 보탤 수 있다.

공 산당 지도자들은 1917년에 반동을 볼셰비키들의 탓으로 돌리려 했던 멘셰비키들과 똑 같은 논거를 이용했다. 사실 우익이 재정비해서 혁명에 타격을 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들의 비겁한 정책이었다. 볼셰비키들의 어떤 색깔의 자본가 정치가들에게도 완고하게 반대하는 독립적인 노동계급 정책만이 노동자들이 반동을 무찌르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했다.

Cunhal과 그의 무리(Cunhal and co)는 반복해서 그들의 자본주의적 “동맹들”에 대한 충성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공산당 신문 Avante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 “ 관 점의 만장일치가 존재하지 않고 심지어 어떤 본질적인 문제들에서 뚜렷한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포르투가 공산당이 다른 민주주의 세력들(democratic forces)과 군대 운동(armed forces movement)과 맺은 타협을 착실하게 준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샛별 1974년 5월 25일)

5월 4일 리스본에서 열린 공산당 대중 집회에서 연사들은 “포르투갈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혼란시키며 모든 희생을 치루더라도 과도한 요구를 하고 파업을 하려는 시도를 비난했다... 모든 연사들은 노동 계급의 단결, 노동 계급과 민중 대중의 단결, 민주주의 운동과 군대 운동(movement of the armed forces)의 단결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샛별, 1974년 5월 27일)

식민지 문제와 관련되었을 때에는 Cunhal은 다음과 같이 논평할 정도로 대담했다. “군대(armed forces)의 일부에서는 이 문제에 관련된 나아갈 길, 수단, 일정 등에 대해 아직 명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신문의 같은 판에서 직원(staff)의 새 우두머리 de Costa Gornes는 이 문제에 관한 완전히 명확한 의견을 보여 주었다 :“해방 운동이 무기를 놓지 않는 이상, 그는 루안다(Luanda, 앙골라의 수도)에 도착하면서 선언했다,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Spinola는 이런 종류의 “자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노동자, 농민, 젊은이가 직면한 사회적 문제들은 병든 포르투갈 자본주의의 기반 아래서는 해결될 수 없다. 만약 공산당과 사회당 지도자들의 정책이 도전 받지 않은 채 계속된다면, 가까운 미래에 유혈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칠레의 교훈이 보여주듯이 대중의 희망과 열망이 좌절된 만큼 유혈 해결책이 불가피해진다. “민중 전선(Popular Frontism)”이란 이름하의 계급 협력(class collaboration) 정책은 항상 불가피하게 노동자들의 가장 끔찍한 패배로 이어졌다.

영 국 노동 계급은 오래 전에 자유주의 자본가 계급의 정치가들과의 약속의 가치에 어떤 믿음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 운동의 값어치가 있었던 승리들은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과 희생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노동자들은 현재 같은 교훈을 빠르게 배우고 있다 :

  • 이베리아 혁명 만세!
  • 시위와 파업의 자유를 방어하라!
  • 아프리카 전쟁을 즉각 중단하라!
  • 자본가 계급 정치가들과 어떤 협상도 없어야 하며 Spinola를 믿지 말라!
  • 민주적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무장시켜야 한다!
  • 토지는 농민(경작자)에게(Land to the tillers) 공장은 노동자에게!
  • 노동자와 농민(peasant)의 정부를 위하여!

    이 런 투쟁 강령으로 포르투갈 노동자들은 포르투갈의 2월에서 포르투갈의 10월로의 이행을 위해 사회의 모든 가난하고 억압받는 부분을 단결시킬 수 있으며 이것을 통해 러시아 혁명 그 자체보다 인류역사에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의 문제점

    초벌번역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번역을 수정할 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Frelimo

    Spinola

    Marcello Caetano

    군 내에서 그가 얻은 명성은 병사의 편이라는 것이었다(His reputation among the military was that of a soldiers' man).

    군대 운동(Armed Forces Movement)

    Carno

     

    이것은 Marcello Caetano 자신이...

    “반란군에 둘러싸인 중심 도시의 Carno 병영의 작은 화장실에 앉아 Spinola가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나라의 지도권을 넘겨받으라고 빌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반란군 본부에서 온 특사가 Spinola의 조촐한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와 동시에 일어났다... 그는 그 특사에게 대통령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Financial Times, 1974년 6월 5일)

     

    junta

    Caxias

    Soares

    Cunhal

     

    노동 계급의 통일된 행동이 필요한 시점에 민주주의적인 세력(forces)과 청년들이 어느때보다 더 필요한데, 민중의 힘(people's forces)과 민주주의적인 기질이 있는 군(democratically-minded military) 사이에 강한 동맹이 필요하다.

     

    Da Palma Carlos

    AW

    Galvao de Melo

     

    많은 일들이 우리를 실망시켰으며 그런 감정과 위엄속에서 이루어진 이 부당대우의 배은망덕함이 우리를 거의 아연실색하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CDE

     

    오늘 Spinola 대통령이, military junta의 우두머리인, 필요하다면 폭력에는 힘으로 맞서는 것에 망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현 상황의 위험이 나타났다.

     

    Almeida Santos

     

    식민지 문제와 관련되었을 때에는 Cunhal은 다음과 같이 논평할 정도로 대담했다. “군대(armed forces)의 일부에서는 이 문제에 관련된 나아갈 길, 수단, 일정 등에 대해 아직 명확할 필요는 없다[!].”

     

    Cunhal과 그의 무리(Cunhal and co)

    Avante

    직원(staff)의 새 우두머리 de Costa Gornes